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2차 북벌 (문단 편집) ==== 장제스의 복직 ==== 장제스와 광동파 등의 약진에 탄옌카이, 리쭝런, 쑨커, 바이충시 등이 광동파 제재를 요구하고 주모자로 지목된 장파쿠이 토벌을 주장하며 광동 측 위원들의 사태에 대한 책임과 사퇴, 난징에서의 중전회 개최, 광저우 사태의 무력 해결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광동파 위원들에 대한 제거 시도를 견제하며 모든 것을 5중전회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에 일부의 반대에도 3차 회의에 광동파 위원들도 모두 참여하였고 왕징웨이 조사에 대한 문제를 두고 잠시 충돌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곤 3전대회 개회지점과 일자를 4중전회에서 결정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이로써 특위의 1928년 1월 1일 이전 3전대회 소집 결정은 완전히 효력을 상실했다. 12월 10일의 마지막 예비회의에서 [[왕징웨이]]와 [[허잉친]]이 정식으로 장제스 복직안을 제출했다. 왕징웨이는 필요하다면 자신이 정치에서 손을 떼고 하야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장제스 복직을 결정했다. 장제스는 광동파 위원들의 난징에서의 안전을 자신이 직접 보장하겠다고 하였고 광동파는 이에 만족했다. 예비회의 결과 장제스는 사실상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제스|귀 동지]]는 작년에 국민혁명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 직권은 본당 중앙이 부여한 것이며 그 공적은 전 국민이 알고 있다. 현재 군벌은 아직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고, 귀 동지는 은퇴할 시간이 아니다. 당내 분규의 근원을 차단하고 북벌을 완수하기 위해 귀 동지가 계속 국민혁명군 총사령의 직권을 집행할 것을 요청한다.|| ||장제스 복직 요구 결의|| 또한 12월 10일 예비회의는 [[광저우 폭동]]을 이유로 대 소련 단교안을 통과시켰다. 장제스는 12월 13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일찍부터 각지의 소련 영사관이 공산당의 정치기관이 되고, 또 소련의 극동은행이 공산당의 금융기관이 되어 있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기관을 봉쇄하지 않는 한 공산당의 소요는 정지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비회의의 마지막 날에 나는 대소 단교안을 제출했다.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는 아무래도 소련과 단교할 필요가 있고, 우리들의 국민혁명이 성공을 거둔 뒤 적절한 기회에 방법을 강구하여 국교 회복을 꾀하면 된다. 지금 서둘러 해야 할 일은 소련 영사관 및 상업기관의 일체 봉쇄이다." 12월 13일 대소 단교안이 발표됨에 따라 12월 14일 국민정부는 국교단절을 선포, 소련 영사관의 철수와 소련 상업기관의 폐쇄를 선포하고 한커우에 체류하는 소련인들을 체포하여 추방했다. 하지만 소련 정부가 이를 수리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29년의 [[중동로 사건]] 중이었다. 한편 왕징웨이는 12월 11일 광저우에서 공산당이 주도한 [[광저우 폭동]]이 발생하면서 광동파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리자 장제스의 복직을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여 12월 17일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여 프랑스로 요양을 목적으로 다시 외유를 떠났다. 결국 장제스는 반대자를 달래고 당의 단합을 과시하기 위해 광동파와 왕징웨이 중전회 출석자격을 박탈하고 [[허샹닝]] 등 5명의 출석을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광동파를 너무 비호하는 장제스의 모습에 장제스를 옹호하던 리스쩡을 비롯한 원로들도 반발하였다. 하지만 장제스의 집권 준비는 그 뒤로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12월 28일 특위 해산이 공포되었다. 4중전회는 1928년 1월 1일 난징에서 소집하기로 하였으나 장제스가 난징에 없어서 미뤄지게 되었다. 1월 2일 국민정부는 장제스에게 공전을 보내 난징으로 올 것을 청했다. ||귀 총사령은 즉시 수도로 돌아와 복직하여, 함께 혁명의 공을 완수하기 바란다.|| 이에 장제스는 1월 4일 오전 8시 상하이를 출발하여 탄옌카이, 양수잠, 하성준, [[천리푸]]를 대동하고 저녁에 난징에 도착했다. 장제스의 난징 복귀 자체가 장제스의 사실상의 복직을 의미했다. 각 역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장제스를 환영했고 탄옌카이는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민중의 기뻐하는 모양을 보아도, 지난해 8월 당신이 하야하고 난 뒤 전국의 인민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1월 7일 장제스는 정식으로 복직하였고 1월 9일, 국민혁명군 직권을 행사할 것을 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에게 알리는 공식적인 복직선언을 발표하여 5개월 만에 화려하게 복직하였다. >"돌이켜보건대, 작년에 갑자기 중도에서 은퇴하고, 중앙으로부터 임명된 직책을 허가 없이 떠난 일에 대해서, 나는 마음의 아픔을 느낀다.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지내온 동지들과 시종 고생을 함께 하지 않은 것은 실로 부끄럽고, 또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다행히도 우리 혁명의 장병은 내외의 모든 곤란 속에서, 주의에 입각하여 선두에 서서 적을 몰아내고 전과를 올려왔다. 이 공로를 깊이 가슴에 새기고 진심으로 치하하는 바이다. 바야흐로 당내는 겨우 단결의 조짐이 보이고, 중앙회의의 거행도 임박하게 되었다. 나는 중앙의 의사에 따라 군령을 하나로 하고 힘을 집중하여, 최단기간에 봉천, 산동의 군벌을 섬멸하여, [[쑨원|총리]]의 유교를 실현하고, 도탄에 빠진 인민을 하루라도 빨리 구출하려 한다. 우리 장병들이 주의를 지키고 성이 되어 함께 혁명의 임무를 다하기 바란다." 이 시점에서도 광서파의 불만도 대단하여 리쭝런은 1월 초에 마지못해 장제스 복직을 환영했으나 바이충시는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완강한 바이충시와는 달리 리쭝런은 장제스와의 타협을 결정하여 광서파는 수그러들었다. 서산파는 사실상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고 무력하게 일본으로 외유하여 장제스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1월 20일 국민정부는 <북벌 전군 전투 서열령>을 반포하여 모든 북벌군이 장제스의 총지휘를 받도록 하였는데 펑위샹, 옌시산, 양수장 등이 즉각 장제스에게 지시에 따르겠다는 통전을 보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